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이글은 1927년 3월6일, 전국 비종교인 협회 런던 남부지부 후원하에 배터시
(battersea)읍공화당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오늘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먼저, ‘기독교인’ 이란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 뜻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요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말을 대단히 느슨한 의미로 하용하고
있다. 그런 의미라면 기독교인은 모든 종파나 교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 말의 적절한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 - 불교인, 유교인, 회교인등 - 은 훌륭한 삶을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나는 누구든 저 나름대로
남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곧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보지 않는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먼저 분명한 신념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 말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
때만큼이나 그렇게 순수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때만 해도, 누군가 ‘나는
기독교인이오,’라고 하면 말뜻 그대로 이해되어졌다. 엄청나게 정교화된 교리
전체를 받아들이며, 교리에 나오는 자구 하나하나까지 확신을 다해 믿는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에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의미는 다소 막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구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될 별개의 조항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는 교리 차원의
것이다. 즉, 야훼와 영생을 꼭 믿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을 자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두 번째로, 좀더 들어가,
크리스천(기독교인)이란 명칭이 내포하듯 크라이스트(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회교도인들도 신과 영생을 믿고 있지만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최소한 예수가 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정도는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에 대해 그정도도 믿을 생각이 없다면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물론 휘태커의 역서(歷書)나 지리책에서 보듯,
세계 인구를 기독교인과 회교도, 불교도, 배물교도 등으로 나누는 관점도 있긴
하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들이다. 지리책에서는 우리를 전부
기독교인에 집어넣고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지리적인 관점이므로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설명하기 위해선 두 가지 문제를
받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첫째, 나는 왜 야훼와 영생을 믿지 않는가?
둘째, 왜 나는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최선(最善), 최현(最賢)의 인간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지난날 비신자들의 성공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기독교에 대하 그처럼 탄력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옛날의 기독교는 훨씬 더 순수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옥에 대한 믿음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영원한 지옥의
불에 대한 믿음은 극히 최근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조항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서는 추밀원(Privy Council)의 결정으로 이 항목이 핵심적인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켄터베리 대주교나 요크 대주교는 그 결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우리의 종교는 의회의 법률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추밀원은
그들 대주교를 무시할 수 있었고 결국 지옥은 기독교인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인은 반드시 지옥을 믿어야 한다고 우기진
않을 것이다.
야훼는 존재하는가?
야훼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아주 중차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내가 이 문제를 정말
제대로 다루려면 ‘천국’이 올 때까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붙잡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땐 내가 이 문제를 다소 약식으로 다루어도 여러분은 날 용서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여러분도 아는 바와 같이, 가톨릭 교회는 야훼의 존재는 순수
이성에 의해 입증될 수 있다는 교리를 못박아두었다. 다소 기묘한 교리이긴 하지만
분명히 그들의 교리 중의 하나다. 그들이 이러한 교리를 도입하게 된 것은 한때
자유 사상가들이, 믿음의 영역에서는 물론 야훼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지만 이성만
가지고 따지자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러저러한 논거들이
존재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장과 논거들이 장황하게
쏟아져 나오자 가톨릭 교회는 중단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야훼의 존재는 순수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못박았고, 자신들의 이론도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말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같은 이론은 물론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만 다뤄보기로 하겠다.
제 1 원인론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론은 제일 원인론일 것이다(이 이론에서는
우리가 보는 이 세상 만물에는 모두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가다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제일 마지막의
원인은 야훼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오늘날 그다지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원인이란 것 그 자체가 과거와 달리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계속해서 원인에 대해 캐들어가고
있지만 옛날과 같은 활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점은 차치하더라도, 제일
원인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이론에서 다소라도 타당성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나의 경우, 젊을 때 이 문제에 대하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고, 오랫동안 제일
원인론을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나이 열여덟이었을 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누가 날 만들었는가?’ 라는 물음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즉시 ‘누가 야훼를 만들었는가?’라는 보다
깊은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아주 단순한 이 구절이 내게 제일 원인론의 오류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야훼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야훼처럼 원인없이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므로 이 이론에는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이 논리는,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다고 보는
힌두교도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럼, 그 거북이는?’하고 물었더니
그 인도인은 ‘우리 주제를 바꿔보는 게 어떻겠소.’ 라고 대답했다. 원인이
없다면 세상은 생겨나지 못했다고 볼 이유도 없지만 반대로, 세상이 항시 그렇게
존재해 있었다고 해서 안될 이유도 없다. ‘세상은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물에는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볼 땐 제일 원인에 관한 이론으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자연법칙론
다음으로, 자연 법칙에서 끌어낸 아주 흔한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특히 아이작
뉴턴 경과 그의 우주론의 영향을 받으면서 18세기 내내 유행했다. 행성들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음을 관찰한 사람들은 야훼가 행성들을
그렇게 특정한 형태로 움직이도록 명령했으며 바로 그 때문에 행성들이 그렇게
돌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편리하고 단순한 설명은 중력의 법칙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수고를 그들에게서 덜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중력의 법칙을 설명한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이 해석한 중력의 법칙에 관해 강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자면 또 얼마간의 시간이 걸릴테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자연은 획일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뉴턴식 체계하의
자연 법칙 따위는 믿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간의 인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까마득히 깊은
우주 공간에서도 1야드는 여전히 3피트라는 것을 여러분은 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가리켜 자연 법칙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연법칙으로 여겨져 왔던 것 중에는 이런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에 반해, 원자가 실제로 하는 일에 대해 알아보면 원자들이 법칙에 따르는
정도가 생각보다 훨씬 낮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도달하는 법칙들은 그저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것들의 통계적 평균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시는 바와
같이, 주사위를 던지면 36회에 한번씩 6이 연달아 나오게 된다는 법칙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 법칙이 주사위가 목적에 따라 구른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매번 6이 연달아 나온다면
거기엔 무슨 목적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 법칙에는 이런 류의
것들이 매우 많다. 그것은 확률의 법칙에서 생겨나는 것과 같은 통계적
평균치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자연법칙의 모든 현상은 과거에 비해
훨씬 감동이 줄게 되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변할지 모르는 과학의 일시적 상태를
대변하는 이러한 측면과는 별도로, 자연 법칙들의 존재는 결국 법칙 부여자를
함축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자연 법치과 인간의 법칙을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인간의 법칙은 여러분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하는 명령으로서, 여러분은 그대로 행동할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 법칙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기술한 것으로서
사물의 실제 움직임을 기술하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순 없다. 왜냐하면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수간 곧 다음의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야훼는 왜 그러한
자연 법칙들만 만들고 다른 법칙들은 만들지 않았는가?’ 만약에 이것이 야훼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결국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뜻이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 법칙의 일관성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만일 상당수 정통 신학자들이 주장하듯, 야훼는 모든
법칙을 만듦에 있어 다른 법칙이 아닌 바로 그것들을 만들게 된 이유 - 물론
최선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하겠지만 실상을 보라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 가 있었다, 다시 말해 야훼가 만든 법칙들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면, 야훼 자신도 어떤 법칙에 따랐다는 얘기가 되므로 야훼를 중재자로
끌여들여봤자 아무런 유리할 것도 없게 된다. 결국 법칙은 신성한 칙령 외부에
그리고 그 이전에 존재한다는 얘기가 되므로 야훼는 별 소용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최종적인 법칙 부여자가 아닌 셈이니까. 한마디로 자연 법칙에
관한 이러한 이론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한다. 나는 이
이론들을 검토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야훼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이용되는 이론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처음에 등장했을 때
그것들은 명백한 오류들을 지식으로 위장한 견고한 이론들이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지적 지지도가 점점 낮아지자 일종의 도덕적 모호함으로 가장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목적론
다음으로 살펴볼 이론은 목적론이다. 여러분도 다 아는 얘기겠지만, 세상 만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꼭 맞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만에 하나 이
상태에서 조금만 달라진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목적론이다. 이것은 때로 다소 기묘한 형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끼의
꼬리가 흰 것은 총 쏘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목적론을
응용한 이 같은 해석을 토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의심스럽다. 패러디(parody)하기
딱 좋은 이론이다. ‘코는 안경쓰기에 알맞도록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고 하는
볼테르의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런 류의 패러디는 18세기에는 엉뚱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윈 이후로
우리는 생물이 각자의 주위 환경에 적합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보다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적응의 기본 원리이다.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전혀 없다.
이 목적론을 살펴보노라면, 온갖 결함들을 지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를 전지전능한 야훼가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정말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생각해보라, 만일
여러분에게 전지전능과 수백만 년의 세월을 주면서 세상을 완성시켜보라고 했다면
고작 공포의 KKK단이나 파시스트 같은 것밖에 만들 수 없었을까? 게다가, 과학의
일반 법칙을 인정한다면 인간과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적당한 과정을 거쳐
결국에는 다 멸종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양계 몰락의 한
단계로서 말이다. 몰락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원형질의 생성에 적당한 온도 따위
조건들이 주어기고 그렇게 해서 태양계 전체의 일생 가운데 잠시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바로 달에서 지구의 예상되는 앞날을 본다. - 죽음, 냉기,
무생명으로 뒤덮인 그 모습 말이다.
그런류의 시각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고, 그런 견해를 믿는다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믿지 말기
바란다. 말도 안돼는 소리들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후에 일어날 일을 두고
정말로 심각하게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자기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실상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훨씬 더 현세적인 일, 이를테면 단순한 소화 불량 때문일 수는
있지만 수백만 년 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정말로 심각하게
슬퍼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생명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우울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 그러나
이따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곰곰이 성찰해보노라면 나로선
그 생각이 차라리 위로에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 그것 때문에 인생이
비참해질 것까진 없다고 본다. 그저 여러분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보게 만드는
정도일 것이다.
신성을 위한 도덕론
이제 우리는, 신학자들이 논증 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지적 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에서 좀더 깊이 들어간 단계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소위 야훼의 존재를
지지하는 도덕론과 만나게 됐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과거 야훼의 존재를
지지하는 지적 이론에는 세 종류가 있었는데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에 와서 모두 처분되었다. 그러나 칸트는 그러한 이론들을 처분하자마자 새
이론을 하나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론이며 그는 이 이론을 굳게 확신했다.
사실 칸트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했다. 즉, 지적 차원에서는 회의적이었고
도덕적 차원에서는 자기 어머니 무릎에서부터 들어온 금언들을 은연중에 믿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정신 분석가들이 강조해 마지않는 사실 하나가 입증된다.
사람에게는 성장 후의 관계보다 유년기의 관계에서 받은 영향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는 얘기 말이다.
어쨌거나 칸트는 앞서 말한대로, 야훼의 존재를 지지하는 새로운 도덕론을
창안했으며 그 이론은 다양하게 형태를 바꿔가며 19세기 내내 큰 호응을 받았다.
그의 도덕론에는 온갖 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는 야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고 그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옳고 그름 사이에 실제로 차이가
있든 없든 나로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사는, 옳고 그름의 차이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럼 그 차이는 야훼의 명령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만일 야훼의 명령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면 야훼
자신에게는 옳고 그림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야훼에게는
선(善)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 뜻 없는 말이 되고 만다. 만일 여러분들이
신학자들처럼 야훼는 선하다고 말하려면 옳고 그름은 야훼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야훼 자신이 옳고 그름을
만들었다는 자명한 사실과는 상관없이 야훼의 명령은 선이며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선, 옳고 그름은 오직 야훼에
의해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 논리적으로 야훼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각장의 기호에 따라, 보다 우월한 신이 있어 이
세계를 만든 야훼에게 명령을 내린 거라도 해도 좋고, 우리가 알 고 있는 이
세계는 사실 신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악마가 만들어낸 것이라도 보는 일부
그노시스(gnosis)주의자들의 노선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가 대단히
그럴싸한 견해라고 종종 생각해보긴 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할 말들이 많을 것이고
나도 지금 그 문제로 시비하고 싶진 않다.
불의 치유론
이번에는 도덕론의 아주 기이한 형태를 하나 다뤄보자. 그것은 야훼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 한편에는 너무도 큰 불의(不義)가 존재한다. 그리고 선한 자들이 고통 받는
일도 많고 악한 자들이 융성하는 일도 많아서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괴로운
일인지조차 분간이 안 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선 이 지구상 삶의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는 내세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긴 안목에서 결국 정의가 존재하게 하기 위해 야훼는 있어야 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논리다.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를 과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세상밖에 모른다. 우주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률에만 입각해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우주 전체의 평균적
표본일 것이고 그러니 여기에 불의가 존재한다면 다른 곳들에도 역시 불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오렌지 상자를 하나 받아서
열어보았다고 가정해보자. 맨 윗줄 오렌지들이 모조리 상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그 밑의 것들은 분명히 싱싱할 것이다. 그래야 불균형이 바로
잡히니까.’ 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상자 전체를 상한 것들로만 채워
보냈겠군.’ 이라고 말할 건인데, 과학적인 사람이 우주에 관해 주장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엄청난 불의를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에 근거하는 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도덕론이 아닌 부인하는
도덕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설명해온 지적
이론들이 사람들을 진정으로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건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정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야훼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적 이론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야훼를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야훼를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
이제부터는, 합리주의자들에 의해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고 종종 생각되는
문제에 대해 몇마디 말하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최선, 최현의
사람이었나 하는 문제 말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누구나 동의할 거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예수에게는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점들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하며, 그 공감의 정도는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와 함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나는 그와 더불어 여느 독실한
기독교인보다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예수가 한 말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주어라.’ 이것은
새로운 가르침도 새로운 신조도 아니다. 예수보다 약 5,6백년전에 이미 노자가
석가가 하신 말씀이다. 그럼, 기독교인들은 진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신조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나라의 현 수상(스탠리 볼드윈)을 예로 들어 봅시다. 그가
독실하기 그지없는 기독교인이라는 데 대해선 나도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가서 그 사람의 뺨을 때려보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아마도 여러분은 수상이 성경의 구절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테지만.
그런데 내가 볼 때 아주 훌륭한 게 하나 더 있다.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잘 알지 못 할
테지만 한때 기독교 국가들의 법정에서 이 신조가 유행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 판사들을 꽤 많이 알게 되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기독교 신조에 위배된다고 느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또한 예수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줄 것이며, 네게서 빌어가고자 하는 자를 외면하지 말라.’
고 했는데 이 말 역시도 훌륭한 신조다.
좀전에 여러분들의 협회장은 우리가 여기서 정치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있지만 나로선 지난번 총선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네게서
빌어가려 하는 자를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의 문제를 두고 붙은
싸움이었으며, 그러니 우리로선 이 나라의 자유당과 보수당이 예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그들은 정말이지
매몰차게 외면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예수의 가르침이 있는데, 내가 볼 땐 아주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부 우리의 기독교인 친구들 사이에선 크게 인기있는 것 같지가 않다.
바로, ‘네가 완벽해지고자 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대단히 뛰어난 가르침이지만 말한 바와 같이,
그다지 실천되고 있지 못하다. 이 모든 말씀들은 다 좋은 가르침이라도 생각한다.
그러나 살면서 행하기는 다소 어렵다. 당장 나부터도 그 말씀들에 따라 산다고
공언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다 그렇다고해도 기독교인은 경우가 한참 다르다.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결함들
나는 예수가 남긴 교훈들이 훌륭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복음서들에 묘사된 것과
같은 예소의 최고 지혜나 최고 선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몇가지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역사적 문제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예수가 과연 존재했는가부터
지극히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우리로선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문제가 대단히 어려워진다. 따라서 나는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이기 때문에 복음
기록자의 해석에 따르겠지만, 그 중에는 그다지 현명한 것 같지 않은 대목
몇군데가 발견된다. 첫째, 예수는 자신이,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에 찬란한 구름 속에서 재림하게 될 것으로 굳게 믿었다. 이것을 증명할 만한
구절은 대단히 많다. 예를 들어 ‘사람의 아들(구세주)이 올 때까지 너희는
이스라엘로 넘어가지 못 하리라.’고 예수는 말했다. 도 ‘여기 서 있는 자 중에
사람의 아들이 그의 왕국으로 들어갈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을 자가 몇 명
있다.’고도 하였다. 예수가 그렇게 믿었다고 보여지는 대목은 그밖에도 많다.
예수는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생전에 자신의 재림이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의 초창기 추종자들도 그렇게 믿었고 수의 수만은 도덕적 가르침의 기초도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가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기타 그와
유사한 말들을 했을 때는 가까운 시일 내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니 현세의 모든
일상적인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던 기독교일들을 실제 몇 사람 알고 있다. 재림이 정말로 코앞에
다가왔다고 말해 교인들을 놀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던 목사도 한사람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 목사가 정원에 나무를 심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안심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들이 정원에 나무
심는 것과 같은 행위들을 삼간 것은 재림이 임박했다는 믿음을 예수에게서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분명히 다른 지혜로운 이들만큼
현명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지고의 현자일 수도 없었다.
도덕상의 문제
이제 도덕적 문제로 넘어가보자. 내가 볼 때 예수의 도덕적 성격에는 대단히
중대한 결함이 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즉, 그가 지옥을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든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복음서에 그려진 대로라면 예수는 분명히 영원한
형벌을 믿었으며, 자신의 설교에 귀 기울이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보복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대목이 수차례 발견된다. 이러한 태도는 평범한 설교자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것도 아니지만 훌륭한 존재가 그런다는 것은 어쩐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를 테면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기
말에 귀 기울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우 부드럽고 점잖았음 보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격분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성자다운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아마도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라든지, 자기와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에게 늘 했던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보게 된다. ‘너희, 뱀의 무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저주를 면하겠느냐?’ 예수가 자신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내가 볼 땐 결코 좋은 어조가 아니다.
복음서에는 지옥을 언급하는 이런 말이 대단히 많다. ‘누구든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많은 불행을 야기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니 모두
성령에 대해 죄를 지은 것 같아 모두들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로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그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 세상에 심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의 왕국에서 거역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를 모두 거두어 불가마에 던져버리니, 거기서 통곡하고 이를 갈게 되리라.’
통곡하고 이를 간다는 대목을 예수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통곡하고 이를 가는 장면을 떠올리며 어떤
쾌감을 느낀 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그처럼 자주
언급될 리가 없다. 다음으로 여러분은 양과 염소에 관한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재림이 일어날 때 양과 염소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얘기하면서 예수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저주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계속해서
‘이들을 영원한 불 속에 사라지게 하라.’고 한다. 이어 다시 이렇게 말한다.
‘너의 한손이 내 뜻을 거역하면 그 손을 끊을지니, 병신이 되어 생명으로 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들어가기 보다
나으리라. 거기에는 언제나 구더기가 들끓고 불이 꺼지지 않느니라.’ 이 얘기
역시 예수는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나는 죄에 대한 형벌은 지옥불로 다스린다는
이 모든 교리가 잔인한 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세상에 잔인성을
심고, 대를 잇는 잔인한 고문을 부여한 교리다. 그렇게 된 원인을 따져볼 때,
예수 기록자들이 묘사한 대로라면 분명 복음서의 예수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중요성은 다소 덜하지만 그밖에 다른 예들도 있다. 이를테면 가다렌(Gadarene)
지방의 돼지떼 관한 대목에서는 참으로 비정하게도 마귀를 돼지들 속에
들어가게하여 온 돼지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 속에 빠져버렸다. 여기서
여러분은 예수가 전능자였다는 것, 따라서 마귀들을 그냥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는 마귀들을 돼지들 속에
들여보냈다. 이번에는, 들을 때마다 늘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무화과
나무에 관한 희한한 얘기가 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얘기지만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시장기를 느낀 예수께서 멀리 서 있는 이파리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그리고 가셨다. 무화과수에 가보니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 외엔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게 되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고
나무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 하리라.’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수를
보소서, 시들어버렸나이다.’ 라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무화과가 열릴 철도 아닌데 나무를
탓하다니 말이다. 나로서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남은
다른 사람들만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런 점들에 있어서는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예수 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적 요소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사람들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이유는 이론과는
아무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서적 이유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는 사람을 덕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종교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나도 그런 얘길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가하진 않는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패러디한 사뮤엘 버틀러(Samuel Butler)의
‘다시 찾은 에레혼’이란 책을 물론 알 것이다. 히그스라는 사람이 에레혼이라는
어느 먼 나라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서 얼마간 지내던 그는 기구를 타고 빠져
나온다. 이십 년이 지난 후 그 나라를 다시 찾은 그는 자신을 태양의 아들로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가 퍼져 있음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가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때마침 그의 승천 기념제가 벌어지려고 하는 순간 그는
행키와 팽키라는 교수들이 서로 얘기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들은 인간
히그스에겐 눈길도 주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다름아닌 태양의 아들교의 고위 사제들이다. 격분한 히그스는 그들에게
가 말한다. ‘나는 이 엉터리 수작을 모두 폭로하고 그들의 신은 바로 나,
인간 히그스이며 나는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거라고 에레혼 사람들에게
밝히겠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이 나라의 모든
도덕은 이 신화를 중심으로 짜여 있어요. 만일 당신이 하늘로 올라간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모두 사악해질 겁니다.‘ 결국 그는 그들의 얘기에
설득당한 채 조용하게 빠져나온다.
바로 이 점이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사악해질 것이랑 얘기
말이다.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들이 대부분 극악했다. 여러분은 이
기묘한 사실, 즉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고 악화되었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나 기독교를
철저히 믿었던 소위 신앙의 시대에는 고문 기구를 갖춘 종교 재판소가
존재했으며, 수백만의 불운한 여인들이 마녀로 몰려 불태워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잔인한 폭력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것이다.
여러분도 세상을 둘러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서적 발전, 형법의 개선,
전쟁의 감소, 유색 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 제도의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뤄질 때마다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교회 세력의 끈덕진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던 경구는 한 번도 없었다. 교회들로
조직화된 기독교는 이 세계의 도덕적 발전에 가장 큰 적이 되어 왔으며 지금
현재도 그러하다는 것을 나는 긴 심사숙고 끝에 말하는 바다.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진보를 저해해 왔는가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내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 가지 사실을 들어보자.
이 얘길 들으면 여러분도 수긍하게 될 것이다. 유쾌한 얘기는 아니지만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유쾌하지 못한 사실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한 순결한 처녀가 매독 환자에게 시집을 갔다고
가정해보다. 이런 경우 가톨릭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이는 파기할 수 없는
신성한 맹세이니 너희는 평생을 같이 살아야한다.’ 게다가 이 여인은 매독에
중독되어 태어날 아이를 낙태하고 싶어도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게끔 되어있다.
이런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가 하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악마적 잔인성에
다름아니라고 단언하는데, 타고난 동정심이 독단으로 깡그리 포장된 사람이
아니라면, 도덕적 본성이 모든 고통의 감각 앞에 완전히 마비된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한 혼인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주장할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위의 얘기는 일례에 불과하다. 현재 이 순간에도 교회는 자칭 도덕이라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과다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는 인간의 행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편협한 행동 규범을 정해 놓고, 그것을 도덕이라고 하기 때문에
교회의 주요 역할은 여전히,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모든 방면의 진보와 개선에
맞서는 데 머문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저러한 것은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므로
그렇게 행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인간의 행복과 그 문제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복이 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도덕의 목적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고 말이다.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이다
종교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한다. 두려움은 그 모든 것의 기초다. 신비한 것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따라서 잔인함과 종교가 나란히 손잡고 간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이 세계를 사는 우리는 과학의 도움으로 이제야 사물을 좀 이해했고 어느 정도
정복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과학이 기독교와 교회에 맞서, 또한 모든 낡은
교훈에 맞서 한 걺 한걸음씩 어렵사리 전진해 온 덕분이다. 인류는 세세손손 그
오랜 세월 비굴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으나 과학은 우리가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과학은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우리의 마음도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본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자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여기 땅에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해, 이 세상을 지난날 오랜 세월 교회가 만들어 온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고 말이다.
우리의 할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로 서서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은 동양의 고대적 전제주의에서
나왔다. 자유인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인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끔찍한 죄인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경멸감마저 든다. 우리는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하게 직시해야한다.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바라던 만큼 되지 않을 지라도 적어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온 세상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지식과 온정과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 혹은 오래전에 무식한 사람들이 뱉어
놓은 말들로 자유로는 지성에 족쇄를 채우는 짓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두려움 없는 직시와 자유로운 지성이 요구된다.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지성이 창조할 미래가
죽은 과거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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